일 중에서도 아르바이트에 대한 얘기라면 참 웃픈 일이 많습니다.
손도 야무지지 못하고 일머리도 없던 저는 스무살 동네 샌드위치 가게에서 한 번, 천호역 어딘가에 있었던 카페에서도 한 번, 얼마 일하지 못하고 손이 느리다고 잘린 일이 있었더랬죠. 시급이 조금 더 높아 갔던 영어 학원에서도 중간에 덜컥 그만두는 바람에 미야자키 하야오 영화에 나올 법한 키 작고 덩치가 큰 떡두꺼비 같은 원장한테 차디찬 교실에 혼자 불려 ‘그렇게 하면 안 된다’며 호되게 혼났던 기억도 있습니다.
라디오 방송국에서 첫 인턴을 했을 때도 그렇습니다. 인서트 편집 못 한다고 매일 PD님한테 잔소리 듣고, 생방송 중에 원고 안 넣어서 박명수 같은 앵커한테 시원하게 욕먹고, 인사해도 까이고, 원고 한 줄도 못 써서 멍하니 앉아있고...
참으로 끈기 없고 맷집 없는 20대 초반을 지나 저는 스물다섯이 돼서야 마케팅 대행사에서 첫 회사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실패 경험이 많았던 저에게 회사 생활은 가장 피하고 싶은 일이기도 했습니다.
근데 웬걸.
잔뜩 긴장하고 입사한 첫 회사에서는 하나부터 열까지 다 가르쳐주는 겁니다. 인턴이라고, 신입이라고 저에게 큰 역할과 책임을 주지도, 바라지도 않았습니다. 처음부터 모든 걸 혼자 해야 했던 전 인턴들이 모든 걸 적어 놓아 물어볼 사람이 없으면 문서라도 뒤적여 볼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밥이랑 커피도 사주다니! PD님이 먹다 남은 아보카도 샌드위치를 먹거나 서서 치킨 조각을 입에 욱여넣으며 일한 전의 인턴 때와 달리 생활이 업그레이드된 것 같았습니다.
열심히 한 모습을 보여서였을까요? 제가 쓴 이벤트 카피가 실제로 반영되게 되면서 저는 꼼꼼하다는 평과 함께 처음으로 정규직 제안을 받게 되기도 했습니다. 정규직 제안을 준 팀장님은 제가 떠날 때까지 때로는 커피, 때로는 술을 사주시면서 절대로 큰 소리로 혼내지 않고 대화로 해결책을 말씀해 주시는 참으로 고마운 어른이었습니다.
그렇게 저를 처음으로 귀하게 대접해 준 팀에서 인생 첫 연봉 협상을 하고 나서 3개월도 안 되어 제 발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 시간 동안 음료 20잔씩을 만드는 알바생으로, 초등학교 1학년부터 중학교 1학년 학생들을 가르치는 영어 선생님이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일과 정면 승부를 보는 일은 제가 무수히 실패했던 아르바이트생의 역할, 즉 고객의 최전방에 있는 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500원짜리 음료 한 잔을 만들더라도 제대로 만들어 고객에게 나가는 것, 10분도 채 안 되는 토론 시간 때 학생들의 하루를 물어보고 그들의 기분을 풀어주는 것, 5분도 안 되는 글쓰기 첨삭 때 내가 배웠던 영작 노하우를 전달해 주는 것.
저는 4년 전 했던 반복적인 육체노동을 다시 하며 다시 노동하는 사람으로서의 맷집을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아무리 작은 역할이라도 최선을 다해야겠다고 마음을 다잡으면서요.
그러면서 얼마 전 제가 초등학교 3, 4학년 때쯤 저를 가르쳐주셨던 선생님이 떠올랐습니다. 필리핀에서 온 지 얼마 안 되어 모든게 부족하다고 생각해 참으로 열심히 살았던 초등학교 시절, 선생님은 의기소침해 보이는 저에게 학기가 끝나갈 때쯤 충분히 잘하고 있다며 손 편지를 써주셨습니다. 십 년이 넘게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그 편지 하나가 저에게 얼마나 큰 위안과 위로가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도 분명 나같이 불안하고 이 일 저 일을 하는 떠돌이 20대였겠죠? 저도 이제 그녀의 나이가 되어 비슷한 일을 하며 생각합니다. 스쳐 지나가는 작은 역할이더라도 자신의 자리에서 기쁘고 선하게 일한 사람의 모습은 잊히지 않는다고요. 숱한 일의 고됨과 슬픔 속에서 나의 기쁨은 나를 스치듯이 기억해 줄 그 한 사람과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이 올 거라는 희망을 위해서라고요.
2023년 끝자락, 이렇게 저는 일의 기쁨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